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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 Jun Young HongJun Young Hong

매년 가을이면 노벨상 발표가 있다. 매년 노벨상 시즌만 되면 어김없이 왜 우리나라의 과학자들은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아쉬워하는 기사가 나온다. 그 동안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던 일본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은 아쉬워하고, 정부 차원에서의 많은 노력 기울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연구 수준의 격차는 많이 메워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혁신'에 방점을 두는 구조나 문화는 아직 부족해 보인다.


우리나라의 장점은 어찌되었든 시행착오를 겪어 가면서 정반합으로 조금씩 발전을 한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정부 과제의 양상이 기존에 비해 긴호흡으로 할 수 있고, 과정중에 기다려주는 기초 연구비들이 있어 감사한 것 같다. 그래도 좀 더 혁신에 방점을 두기를 원한다면, 소수의 탑 연구자들에게 연구비를 몰아주는 것보다는-비록 눈에 잘 띄고 성과를 과시하기 어려울 지라도- 가장 아이디어가 많을 아직은 성장하고 있는 신진연구자나 연구원들에게 많은 지원이 있어야 할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만큼 중요한 것은 공정한 시스템인 것 같다. 한국의 양궁이 세계적인 탑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이유도, 또 역으로 국가 수준의 투자에도 불구하고 중국 축구가 계속 월드컵에 실패하는 이유도, 공정한 시스템의 유무에 있다. 양궁의 국가대표 선발은 공정함을 넘어서 매몰차지만, 과거의 기록보다도 그 시기의 가장 컨디션이 좋은 선수들이 선발될 수 있어, 세계적 경쟁력을 유지하게 된다고 한다. 중국 축구의 경우, 자국 리그의 연봉 인플레등과 맞물려 축구 선수가 하나의 안정적인 직업이 되면서, 자본의 논리가 들어가기 시작했고, 실력보다는 인맥과 돈이 우선되면서 경쟁력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중국의 수많은 인구 중에 분명히 축구를 훨씬 잘할 수 있는 신체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많겠지만, 유소년 시기 부터 재력과 인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기회조차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좋은 선수들이 성장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투명하고 공정한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흙속의 많은 진주들이 있다 한들, 발굴될 기회가 없다. 사실 노벨상 수준의 혁신을 원한다면, 이는 main stream (주류) 에 있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이곳의 진주들은 여전히 흙이 묻어있는 채의 날것 상태라서 fancy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잠재력만을 보고 투자하기 위해서는, 다른 요소들의 제약을 덜 받을 수 있는 투명하고 공정한 시스템이 뒷받침 되어야 할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길을 가는 과학자들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할것이다. 적어도 일본이 우리와 다른 점은 그것이다. 그들은 한 길을 꾸준히 걸어가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 일본에서 꾸준히 노벨상이 나오는 이유도 트렌드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한 길을 걸어가는 연구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사회적으로 격변을 겪으며, 고도 성장을 해왔던 나라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울 것을 요구 한다. 물론 이것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무엇인가를 계속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K-pop과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세계시장에서 우뚝 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에 있어서는 새로운 연구 분야를 열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와 동시에 깊이가 있어야 한다. 깊이가 없이 새로운 개념만 제시한다면 이론이 아니라 가설로만 남을 뿐이다. 그래서 한 방향으로 꾸준히 걸어가는 것이 또한 필요하다.


이러한 부분들이 여러 시행착오 이후에 균형을 잡고 잘 세워져 간다면, 한류가 세계를 선도하듯, 연구도 그렇게 될 날이 오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작성자 사진: Jun Young HongJun Young Hong

주기적으로 학계에서 나오는 뉴스 중 한 가지는 ‘표절’과 ‘조작’에 관한 것이다. 이런 윤리적 이슈는 그 동안 한 사람이 학계에서 쌓아올린 명성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만큼 치명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일들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단순히 한 개인 혹은 집단의 윤리의식이 약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의사 소통과 의사 결정 과정의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하는 경우도 많다.


영어에 보면 devil’s advocate 라는 표현이 있다. 이 단어는-아마 현재도 있는 직책일텐데-카톨릭에서 어떤 사람에 대한 시복/시성을 심의할 때, 일부러 반대편에 서서 비판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부를 때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의미가 확장되어, 어떤 논의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반대편의 자리에 서서 철저하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서양의 문화에서는 Discussion 과정에서의 비판과 개인에 대한 공격을 별개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서, 이런 신랄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미국에서 보았던 장면 중, 정말 신기했던 것은, 이렇게 과열되게 논쟁을 주고 받던 두 사람이 발표가 끝난 후에는 사이좋게 밥을 먹으며 이야기 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지만). 어쨌든 서양의 문화에서는 누군가를 지정하지 않더라도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고, 또 만약 누군가 devil’s advocate의 역할을 맡게 되면 충실히 그 역할을 하고 비판을 받는 사람도 이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비율이 더 적다.


그런데, 한국과 같은 동양의 문화는-아마도 유교적 영향으로-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비판에 대해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문제가 있어도 못본척 하거나, 자신의 일이 아닌 이상 굳이 깊이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것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것이 구조화될 때 문제가 되며, 자정 능력의 상실로 연결될 수 있다.


특별히 한 랩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대개 누군가는 알게 마련인데, 리더가 정말 나쁜 의도가 없었는데도 표절과 조작의 문제들이 발생한다면 이는 아무도 devil’s advocate의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일 수 있다. 즉, 문제가 있는 것을 아는 몇몇 사람들이 자신의 일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있으므로 침묵하는 것이 구조화된 것이다. 그런 비판적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의사 소통의 구조가 만들어지게 되면, 사실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 된다. 이렇게 되면 초반에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작은 문제가 나중에는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막게 됨으로,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결과가 초래되는 것이다.


특별히 과학의 영역은 자신과 자신의 가설을 detach 시켜 객관화 시켜 검증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자기 객관화는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동료들이 필요하다. 멀리 갈 것 없이 랩안에서 건설적 비판의 질문이 오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동료들을 통해 나와 다른 비판적인 관점에 대해 들어야 한다. 그래야 더 확실하고 더 완전하고 더 깊은 연구가 가능하다. 그래야 표절과 조작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디스커션과 비평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가 이런 것을 하려면 연습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먼저는 제 3자의 연구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보는 연습이 필요하겠고, 그리고 연구의 완성도가 어느정도 올라갔을 때, 누군가에게 devil’s advocate를 해달라고 이야기하고 내 연구에 대한 비평을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개인적 성향으로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PI가 어느정도 악역을 해야함을 느낀다. 인격적으로 까탈스럽다는 평을 듣는 교수님들의 랩에서 오히려 뛰어난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이유도 어쩌면 같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작성자 사진: Jun Young HongJun Young Hong

우리 연구실의 핵심 가치 중 가장 첫 번째가 ‘지속적 성장’이다. 끊임없이 배우고 학습하는 것을 제일의 가치로 여기고 이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랩의 운영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지속적 학습’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면서 막연히 생각하기로,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모습은 아마도 끊임없이 질문하는 태도와 논문을 많이 읽는 모습 혹은 새로운 방법론에 대해 적극적 습득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학습’에는 무엇인가가 빠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때 ‘성장’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학습과 성장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 둘은 적어도 한 가지에 있어서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곧 통증이다. 성장에는 성장통이 있지만, 학습에는 학습통이 없다. 물론 교과서 내용을 공부하고, 논문을 보며 새로운 방법론을 배우는 것도 상당한 노동과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에, 수고와 노력이 따른다. 그러나 여기에는 ‘나’라는 존재가 직접 관여되어 있지는 않다. 즉, 어떤 논문을 비판을 하더라도 그 논문을 쓴 주체도 내가 아니고, 방법론의 한계를 생각하더라도 그것을 만든 사람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학습과정에는 고통이 별로 없다. 그러나 성장은 다르다. 성장은 내가 변화되는 것이다. 지금의 나로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생각, 나의 태도, 나의 습관 등 현재의 나의 상태에 대해 만족하면서 성장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나에 대해 비판적으로 봐야하고, 내 생각을 바꿔야 할 수도 있고, 태도를 바꿔야 할 수도 있고, 습관을 바꿔야 할 수도 있다. 이 과정은 고통스러우며 통증이 있게 마련이다.


연구에 있어서는 학습의 부분도 있고 성장의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학부생까지의 과정은 학습의 부분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가 되기 위한 대학원의 과정부터는 성장의 과정이 있고, 성장통이 있다. 단지 연구 뿐만아니라 20대후반-30대초반의 나이에는 많은 성장통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과정을 거쳐야만 전문성을 가진 제대로 된 연구자가 될 수 있다.


나무도 자랄 때 시기에 따라 자라는 속도가 다른 것처럼, 성장에도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는 지점은 역설적으로 내가 성장이 아니라 오히려 후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때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너무 진부하여 그 의미가 오히려 희석되지만, 정말로 성장의 지점은 실패의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외부로부터 변화에 대한 강력한 신호가 오기전까지 자신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런데,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기존의 내가 해왔던 방식, 삶의 태도, 내 생각과 고집을 돌아보게 되고 비로소 변화를 생각하게 된다. 이 시간은 정말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장 많이 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연구의 과정에서도 돌이켜보면, 가장 많이 배웠던 때는 실험이 잘 안될 때였다. 왜 될 것 같은 실험이 안되는 지 붙잡고 논문을 보고 고민을 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부분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고, 구체적으로 어떠한 조건에서 성공하며 실패하게 되는 지,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까지도 배우게 되었다.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잘 될 것 같은 일들이 잘 안될 때, 이를 붙잡고 씨름하면서, 내가 고치고 바꿔야 할 생각과 방식과 태도가 보였다.


지속적 성장은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나는 성장하고 있는 가? Safe zone을 벗어나서 도전하고, 고통을 감내하며 가지를 치고 도려내며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가? 또 다른 성장의 지점에서 질문하게 된다..

​면역생리 발달프로그래밍 연구실

Department of Systems Biology

Yonsei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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