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사람을 정말 오랜 만에 만났을 때, 예전 모습 그대로인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대개 사람에 대해서 ‘변했다’라는 표현을 할 때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은 데, 세월이 지나서 더 좋게 되어 만나는 것보다 반대의 경우가 더 많아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보통 우정이나 신념 등,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과 이야기 하면서 결코 변하지 말자고 서로 다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러한 다짐들도 잘 지켜지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삶의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생각이 달라지기도 하고, 어울리는 사람들도 계속 바뀌면서 살아가는 방식도 변하게 마련이다. 무엇보다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변할수 밖에 없는 것도 있다. 나이에 따라 어쩔수 없이 변해가는 부분들이 그러할 것이다. 이처럼 변화하는 것은 피해갈 수 없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한다면, 결국 중요해지는 것은 변화가 좋은 방향으로 이루어지느냐 나쁜 방향으로 이루어지느냐 라고 할 수 있다.
생명 현상도 예외가 아니다.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똑같은 신체를 가진 일란성 쌍둥이들도 전혀 다른 건강의 지표를 나타내기도 한다. 또 우리 몸도 지속적으로 변해가며 나이에 따른 여러 차이가 나타나고, 나이가 들수록 여러 질환에 더 취약해지게 된다. 노화에 따른 안 좋은 방향의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2.
이번 학기에 암생물학 과목을 가르치면서, 세포가 암세포로 악성화되어 과는 과정과, 사람이 안좋은 방향으로 변해가는 것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계엄령이 터지게 되었고, 이 주제에 대해서 조금 더 깊게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악인은 처음부터 악인이었을까?’ 라는 질문과 함께, 그렇다면 ‘누군가를 악하다고 이야기할 때 어떠한 기준을 갖고 악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해보게 되었다.
먼저 암부터 살펴보면, 암의 발병원인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실 복잡하다. 원인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암의 발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돌연변이라고 할 수있다. 돌연변이는 환경적 요인에 의해 촉발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우발적으로 일어난다. 하지만 모든 돌연변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몸에는 감시 시스템이 존재하고 이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암의 발병에서 더 중요한 요소는 단지 우발적인 돌연변이가 일어났느냐보다 감시시스템이 잘 작동하느냐가 더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감시시스템은 크게 세포의 내부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리 몸의 세포는 놀랍게도 내부적인 감시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돌연변이가 발생하면 이를 바로 제대로 고치려고 한다. 그럼에도 손상이 심각하여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세포는 스스로 자멸(apoptosis)을 선택한다. 이것이 바로 세포 내부의 감독관, 즉 tumor suppressor gene의 역할이다. 그러나 암세포가 악성화 되는 과정에서는 이러한 내부적인 감독관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추가적인 돌연변이를 획득한다. 이를 통해 감시 체계의 신호를 무시하고, 세포는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변한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때는 주변의 면역세포가 외부적인 감시 시스템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내부적 감시체계를 뚫고 나온 암세포를 찾아 사멸을 시키게 된다. 그러면 암세포는 추가적인 돌연변이 획득 등을 통해서, 다시 이러한 면역세포들을 무력화 시키게 된다. 이 치열한 싸움에서 암세포들이 주도권을 차지하게 되면, 증상으로 발현되는 종양이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암세포가 취하는 전략들, 즉, 면역적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자신의 생존에 도움을 주는 세포를 끌어들여 주변의 압력을 이겨내며 악성화하는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다.
3.
이러한 과정은 한 인간이 변질되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암세포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에 비견할 수 있는 일들은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여러 우발적인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건 자체가 사람을 안좋은 쪽으로 변화시킨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사건 자체보다는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선택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우리가 때로 가진 결정권을 보고서 약간의 편향된 평가를 통해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하면서 우리 손에 이득을 쥐어주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이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러한 사건을 만나게 되면, 우리 내부의 감시 시스템이 작동한다. 우리의 내면에서 느끼는 경고음, 즉 양심의 소리가 있다.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 했던 것처럼, 우리 자신안에 ‘두 명의 나’가 있어서 이 둘을 일치시키려는 소리일수도 있고, 기독교등에서 이야기 하는 신의 외침일 수도 있다. 이러한 내부의 경고음은 세포안의 tumor suppressor gene 처럼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안내한다. 그런데 이때 이 경고음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을 막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처음에는 분명하고 강하게 들리던 경고음이, 반복적인 무시 속에서 차츰 희미해지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어떠한 조건에서 한 인간을 악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한나 아렌트는 이를 ‘사유의 부재’로 이야기 했다. 그녀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사례에서, 그가 흔히 상상하는 악마적 모습이 아닌, 오히려 굉장히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놀랐다고 했다. 아렌트는 이 사례를 고찰하면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 이야기 했고,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는 것, 즉 시스템을 그대로 따르면서, 생각하지 않는 것 자체가 악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악성화의 길로 가지 않는 첫번째 브레이크는 바로 우리의 내면안의 감시시스템의 말을 듣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귀를 기울이고 자신을 성찰해보아야 한다. '내가 틀렸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스스로의 선택과 동기를 비판적인 태도로 돌아보아야 한다. 악인에게는 이러한 사유와 성찰이 없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겉보기에 악마적 모습을 갖고 있지 않는 다 하더라도, 악한 길에 서있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이 때 중요해지는 것은 우리 주변의 동료들이다. 마치 면역세포에 의한 감독처럼, 우리 주변에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경고를 해줄 수 있는 건강한 관계들이 있다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을 수 있다. 당장은 괴로워도 이러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좋은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이상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그 좋은 관계 속에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까지 포함해야 한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만 주변에 있으면 echo chamber를 만들면서 다같이 변질의 길로 갈수 있다.
4.
과연 악인은 처음부터 악했을 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 많은 선택의 순간에 사유하지 않고, 내재적 경고음을 무시하고, 자신에게 좋은 이야기만 해주는 사람들과의 관계만 쌓아왔기 때문에 계속 그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악해질 가능성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것이 어쩔수 없다 하더라도, 변화의 방향은 우리 스스로 정하는 것이라면, 지금부터 조심 조심 생각하고 선택해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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