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 ‘흑백요리사’가 큰 인기를 끌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에 시작했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전 회를 정주행하게 됐다. 이미 명성을 쌓은 백수저 요리사와 아직은 덜 알려졌지만 실력파인 흑수저 요리사의 대결이라는 설정부터 신선했고, ‘블라인드 테스트’라는 설정은 그야말로 백미였다. 특히 균형을 잃기 쉬운 심사 자리에서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진 두 심사위원이 상호보완을 통해 조화를 이루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회차가 진행될수록 점차 더 최고의 자리에 있는 요리사들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정말 놀라웠다.
이 프로그램을 보며 문득 요리와 연구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 세밀함(Detail)에서 드러나는 질적 차이
첫 번째로 느낀 건, 음식의 퀄리티에 대한 집요한 기준이었다. 초청받은 요리사들은 이미 실력이 보증된 인물들이지만, 경연 중에도 끊임없이 평가받았다. 예선에서 심사위원들의 평이 인상적이었다. ‘야채의 익힘정도’, ‘고기가 even 하게 익었는지'에 대한 평들이 등장하고 유행어처럼 되었는데, 결국 이러한 것은 요리의 가장 기본이 되지만, 숙련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항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료의 상태에 따라 또 재료의 크기에 따라, 불의 세기에 따라, 야채나 고기를 최적의 상태로 익힐 수 있다는 것은 오랜 기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숙련된 실력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은 겉보기에 큰 차이가 아닐 수도 있지만, 숙련된 눈으로 그 디테일을 보고자 했다. 그 결과, 아주 미세한 수준의 디테일의 퀄리티까지도 완벽한, 속이 꽉찬 실력자만이 예선전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연구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처음엔 눈길을 확 끄는 결과가 있을지라도, 데이터의 디테일을 들여다볼수록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겉으론 주목받지 못해도 깊이 들여다볼수록 감탄이 나오는 연구도 있다. 결국 진짜 실력이란, 어느 단면을 봐도 빈틈없는 상태 일것이다. 실험에서도 조건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으면 들쭉날쭉한 데이터 포인트들만 남고, 큰 오차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를 보는 다른 연구자들은 이를 통해 연구자의 실력을 자연스레 가늠하게 된다.
결국, 아무리 급해도 제대로 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디테일로 감탄하게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연구자 일것이다.
2. 차별화의 힘
본선에 진출한 요리사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기본기가 탄탄한 것을 넘어서 각자만의 ‘필살기’를 하나씩 더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특정한 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매진한 결과로 얻어진 특별한 능력들이었다. 필살기의 종류는 달랐지만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질 수 있지 않을 까 싶었다. '테크니션' 계열의 요리사들의 요리는 어디서나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요리를 일지라도, 먹방 유투버들 조차 정말 다르다고 느끼도록 극한의 테크닉으로 참 ‘맛’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발명가' 계열의 사람들은 완전히 새로운 조합으로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내어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회차가 거듭될수록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사람은 두 가지를 모두 가진 이들 뿐인 것을 또한 보게 되었다.
이 부분도 연구와 닮아있었다. 최고의 연구 그룹도 어떻게 보면 테크니션과 인벤터 계열로 나눌 수 있다. 세상을 놀라게 할 새로운 도구와 방법을 개발하는 연구자도 있고, 기존에 없던 질문과 접근으로 승부하는 연구자도 있다. 그러나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 요리사들이 그러했듯, 최고의 자리에 있는 연구 그룹들은 두 가지를 모두 갖고 있는 연구 그룹들이다. 창의적인 질문으로 시작하지만 최고의 현란한 테크닉을 담아서 부정할수 없는 방식으로 대답하는 식이다.
3. 스토리가 담긴 요리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느낀 것은 요리사들이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예술가라는 점이다. 심사위원들은 항상 "왜?"를 물었고, 요리사들은 요리에 담긴 철학과 이야기를 풀어냈다. 사실 연구도 깊이 들어가면 마찬가지다. 요리도 처음엔 단순히 ‘맛’이 중요할지 모르지만, 수준이 올라가면 ‘왜’가 더 중요해진다. 연구도 처음에는 어느 정도 이상의 퀄리티가 중요하지만, 그 이상에서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이 연구를 왜 했느냐’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화려한 테크닉과 엄청난 데이터가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연구의 핵심이 되는 과학적 질문이 명확하지 않거나, Scientific story telling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4. 끝없는 창의력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무한요리지옥’이었다. 같은 재료로 다른 요리를 계속 창출해야 했는데, 회를 거듭할수록 참가자들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에 다다르는 장면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셰프는 매번 완전히 새로운 요리를 내놓았다. 재료의 특성을 꿰뚫는 이해와 다양한 요리 경험에서 나오는 창의성은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연구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연구의 가치는 ‘새로움’에 있고, 이를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아이디어가 고갈되고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 일부 연구자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문제를 접근해 새로움을 만들어 낸다. 또 다른 연구자는 다른 분야의 원리를 가져와 혁신을 더한다. 어떤 면에서 이 부분은 상당 부분이 재능일수도 있겠지만, 경험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 Generalist와 Specialist 가 각기 장점을 갖고 있겠지만, 타 분야의 근본원리를 가져와 다른 분야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잘하려면 Generalist가 이때는 더 유리할 수 도 있다. 분야를 넘어서의 근본적 호기심이 그래서 중요할 수 있다.
5. 열정과 사랑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마지막에 등장했다. 우승을 한 사람의 인터뷰가 아니라 오히려 일찌감치 탈락했던 한 요리사의 인터뷰에 큰 울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요리를 너무 사랑한다면서 울먹이며 이 길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요리사도 정말 힘들지만 자신은 이 길을 계속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단순한 예능이 아니라 감동도 마련해준 프로그램에 대해 놀라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삶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가끔해보게 되는데, 직접 타인을 돕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과 삶을 대한 이러한 태도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연구도 마찬가지 일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신의 수고와 노력의 가치를 믿으며 묵묵히 길을 가는 연구자들은 결국 주위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나는 그러한 연구자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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