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우연과 필연

  • 작성자 사진: Jun Young Hong
    Jun Young Hong
  • 9월 26일
  • 3분 분량
ree

얼마 전 한 학생과 진로 상담을 하던 중, “교수님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연구를 계속하게 만드는 힘은 무엇인지”라는 진지한 질문을 받았다. 예상치 못한 깊은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자세를 고쳐 앉고 즉각 떠오른—그리고 너무도 확실한—대답을 했다.


“재미있어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유는 여러 가지다. 성격적으로 맞는 부분도 있고, 가르치는 것도 좋아하고, 인정도 받을 수 있고, 때로는 창업이나 경제적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과학 자체가 주는 어떤 만족감 때문이다.


학생의 다음 질문은 더 어려웠다. “그런 재미를 느끼는 건 타고나는 것인가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런 길은 맞지 않은 건가요?”


솔직히 내가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다만 내 경험을 토대로 이렇게 말했다.


“저도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어요. 대학원에 들어와 1년쯤 됐을 때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고, 박사 과정 내내 가장 큰 고민은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연구에 그렇게까지 열정적이지 못할까’ 하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그랬다. 박사 과정에서, 같은 바이러스라도 나이에 따라 정반대의 면역 반응이 나타나는 현상을 발견했다. 흥미로운 주제였고 좋은 논문을 냈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깊이 들어가지 못했고, 들어가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 늘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다가 포스닥 시절 Ruslan 교수님 밑에서 배우며 비로소 눈이 열렸다. 생물학이라는 학문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알게 되었고, 뛰어난 동료들과 토론하며 연구의 진짜 재미를 느꼈다. 무엇보다 큰 질문에서 출발해, 그 가설이 실제 현상으로 드러나는 순간을 경험하면서 “연구의 맛”을 처음 보았다. 아마도 그 맛을 잊지 못해 지금도 계속 이 길을 걷고 있는 것 같다.


대답을 하며 그 시절 Yale에서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랩 미팅, Department Seminar, Research in Progress 같은 자리에서 다른 연구자들의 발표를 들으며 놀라운 발견들을 마주했다. 이런 연구들은 마치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면서도 완결성을 지닌 영화처럼, 깊은 만족을 주었다. 이런 발표를 들을 때 내 안에서 수많은 질문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이렇게 질문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영어 표현 “burning question”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그때 체감했다. 이 시기의 경험이 내가 연구에 열정을 가지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물론 연구의 과정이 언제나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은 negative data와 씨름하는 시간이었다. 그 결과가 단순히 실험 조건의 문제인지, 아니면 가설 자체가 잘못된 것인지 고민하며, 그래도 ‘한 번 더’를 다짐하고 다시 도전했다. 실패의 순간이 더 많았다. 그런데도 가끔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데이터 속에서, 아주 우연히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때가 있었다. 포스닥 시절의 메인 프로젝트도 사실은 연구 과제 지원 때문에 우연히 시작한 암 모델 실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 우연한 시작은 점차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방향으로 이어졌고, 결국 developmental plasticity 라는 가설과 맞아떨어지는 결과로 마무리 되었다. 그때의 짜릿함은 그간의 실패를 보상해주었고, 아마도 이것이 내가 느낀 “연구의 맛”이 아닐까 싶다.


이 과정을 거치며 배운 것이 있다. 사실 박사 과정에서 내가 열정을 크게 가지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연구가 때로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결과를 어떻게든 해석할 수는 있었지만, 그 안에 일관된 원리나 큰 그림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포스닥 시절의 연구를 통해, 생물학을 관통하는 깊은 원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배우게 된 것은, 그 탐구가 때로는 serendipitous하게—예상치 못한 방식으로—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사실 인생의 많은 것들이 이렇게 ‘우연의 옷을 입고 찾아오지만, 알고 보면 필연’ 인것이 많았다. 생물학을 시작하게 된 것도 아주 우연한 전화 한통 때문이었는데, 돌아보면 운명 같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단지 삶에서가 아니라 과학을 하는데에서도 이런 우발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 단순한 재미를 넘어 내게는 신비로 다가왔다. 생각해 보면, 만약 세상이 완전히 정해진대로만 움직였다면 우발적 요소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딱 맞춰진 기계처럼 예측 가능하다면, 탐구의 즐거움도, 새로운 발견의 놀라움도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모든 것이 무작위로만 굴러가고, 아무런 패턴이나 일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학이라는 도구 자체가 존재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복 실험을 통해 결과를 재현할 수도 없고, 수학과 같은 모델로 세계를 설명할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 두 패러다임의 절묘한 조화 속에 있는 것 같다. 미시세계로 들어가면 모든 것이 불확정적이고 확률로만 기술할 수 있다. 전자의 위치, 분자의 움직임, 면역세포 수용체의 생성 등. 이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무작위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작은 단위의 무작위가 모이고 모여 거시세계에서는 놀랍도록 질서정연한 패턴과 법칙을 드러낸다. 별은 일정한 궤도를 그리며 움직이고, 생명체는 분자수준의 자기조직화를 통해 안정된 구조를 만들고, 면역계는 정확하게 병원균을 찾아 제거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늘 경이로움을 느낀다. 우연과 필연, 우발성과 일관성이 함께 얽혀 있는 이 독특한 조화 속에서, 단순히 자연의 기묘함을 막연히 생각하는 것을 넘어, 그 이면의 더 깊은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것을, 폴킹혼이 이야기 했던-세상을 일관되고 탐구가능하게 만들면서도 피조세계에 자유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자기 비움을 나타낸-신적 이성과 신적 사랑의 흔적으로 본다. 세상이 이처럼 “닫힌 기계”도, “무의미한 혼돈”도 아니고, 자유롭게 열려 있으면서도 질서를 품은 세계이기에, 면밀히 조사해야 할 연구의 대상이 될수 있으며, 놀라움으로 가득차 있는 보고가 될 수 있다. 즉,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느끼는 그 경이로움과 신비가, 결국 지금도 나를 연구의 길로 이끄는 가장 근본적인 동력인 것 같다.

댓글


​면역생리 발달프로그래밍 연구실

Department of Systems Biology

Yonsei University

  • Twitter Clean Grey
bottom of page